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지면에 발이 닿아 있는데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고 분명 피부로 살을 에는 듯한 차갑게 식은 공기가 느껴지는데 아무런 감각도

키세키가 환히 웃어 어째 난 이 웃음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 산즈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온기가 식어가는 뺨을 감싸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기꺼이 산즈에게 자신을 맡기는 키세키가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무감한 표정 흉터 짙은 입꼬리 뒤틀린 마음 사랑 불면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 과격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어 남에게 상처를 주며 자신의 마음에도 난도질을 하고 이윽고 죽음까지 이르게 만들어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웃고 싶어지니까 네가 울 때 난 같이 울어줄 수 없으니까

씨발... 퍼뜩 잠에서 깨어난 산즈가 욕을 지껄이며 제 이마를 짚어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잔뜩 찌푸린 미간을 손바닥으로 눌러 억지로 피면 떠오르는 너의 낯짝이 혐오스러워 죽어서도 날 괴롭히는 너의 얄팍한 애정은 그 자식에게 줬던 마음에는 절대 비교 불가할 수준이면서

그날 이후 멀쩡하게 잠들었던 날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야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냉장고까지 걸어가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셔 흉터를 지나 바닥까지 줄줄 흐르는 물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그래 난 더러운 새끼니까 네 말대로 난 추잡한 놈이니까 추한 방식으로 살고 있어 어때

어느새 바닥을 보인 생수병을 신경질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던져버려 ... ... 두통이 도통 가시질 않아 네가 죽고 나서 찾아온 이 두통은 그칠 생각을 안 해

아...
내가 죽여서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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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사변 직전 도주했던 키세키가 결좋은 흑색 머리칼의 색을 죄 빼고 금발로 살았던 이유는 도주하는 범죄자 신분인지라 자신을 숨겨야 해서 그런거였습니다

이 시점의 키세키는 아카네와 비슷한 외형이기도 하죠 애초에 사람 보이는 인상이라는 게 있으니 남들은 아카네를 연상시킬 수 없지만 재회한 카쿠쵸는 알아챘습니다 키세키가 일평생 아카네 흉내를 내고 있었다는 것을요

자신에게 지어줬던 사랑스러운 웃음도 전부 애정에서 비롯된 진심이었다기보단...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평생 기억하기 위한 키세키의 발버둥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카쿠쵸는 평생 그 웃음에 갇혀 살아갈 것이니

변함 없는 카쿠쵸의 순애에 부조화를 느낀 키세키는 다시금 카쿠쵸를 밀어냈고 이자나를 대신해 천축의 꿈을 이루려했던 카쿠쵸는 언제까지고 키세키에게만 매달릴 수 없었기에 그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반면 천축 자체에는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던 산즈는 잊을만하면 키세키를 찾아와서 속을 들쑤시고 갔어요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나중에는 안 오면 괜히 심심했던 키세키는 어느날 문득 깨달아요 자신이 삶의 순간 속에 아카네의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요 그날 키세키는 길고 부시시했던 금발을 단정하게 잘라내고 까맣게 덮어버렸어요

혼자만 어른이 되어버린 키세키를 좋아해요 산즈와 카쿠쵸는 어른이 되어도 어린 시절에 갇혀 살기를 자처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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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쵸 답지 않게 패닉 와서 죽었어, 전부 죽어버렸어요 하고 키세키한테 안기는 건 좋은 것 같다... 당황한 키세키가 누가? 누가 죽어? 하면서 안겨오는 카쿠쵸 적당히 받아주고 있는데 조용히 따라온 산즈가 뒤에서 카쿠쵸 급소 쳐서 기절시켜버리는 거

카쿠쵸가 그대로 정신 잃고 쓰러지니까 키세키도 뒤로 넘어지는데 황당해서 눈만 끔벅거리면서 카쿠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산즈를 쳐다 봐 평소랑 똑같아 너무 평온해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뻔뻔한 낯짝이 웃지도 울지도 않고 씰룩이는 흉터 짙은 입꼬리가

귀찮아서
...
그냥 다 죽였어
...
죽이고 싶으면 죽여야지
...
네가 가르쳐줬잖아 쿄우
너한테 한 말 아니었는데 그거
역시 난 카쿠쵸가 아니라서 안 되나?

산즈가 카쿠쵸에게 가지고 있는 묘한 열등감이란

제 인생에 키세키 쿄우라는 존재만 없었어도 평생 신경쓸 일 없을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할 놈인데 이건 질투가 아니야 순수한 열등감 그 자체라서... 자신이 이겨내지 않으면 평생 남을 추한 감정 다만 산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겠지 둘 중 하나를 죽인다든지

추한 감정이니까 추한 방식으로 해봤어 언제는 넌 이런게 잘 어울리는 개새끼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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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텐더의 회고록

늘 혼자 오는 여자는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밝히지 않지만 내가 바텐더로서 의무를 지키기 위해 떠드는 말에 대꾸를 잘했다 가끔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화법을 쓰며 변덕을 부린다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만 자꾸 들게 만들어 정말 미스터리 그 자체다 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다

패턴은 언제나 비슷하다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바 테이블 가장 끝에 앉고 일행은 없다 첫방문에는 추천을 받았는데 여성분이라 부드러운 칵테일을 위주로 권했다가 웃는 낯으로 대꾸를 하지 않은 탓에 메뉴를 바꾸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여자가 두 잔을 마시면 귀신같이 입구에 종소리가 울린다 여자를 데리러 온 남자가 왔다는 소리다 여자는 바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어디든 연락을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데리러 오는 남자는 두명 얼굴에 흉터가 있다 대부분 이마에 가끔은 입가에

이마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다정하다 여자를 대하는 태도하며 말투까지 전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다 아니, 영혼이 담겨있지 않다 ...한낱 바텐더 주제에 다정을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문장을 정정한다 이 여자 외의 사람에게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입가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으나 내게도 살갑게 말을 붙일 때가 있다 다만 대화 주제가 이상해서 나는 말을 이어가기 어렵다 여자와의 대화도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여자는 잘만 받아친다 신기할 지경이다

남자가 어깨에 팔을 두르면 여자는 나갈 채비를 한다 계산은 현금으로 잔돈은 팁 지나치게 많을 때는 부담스러움에 멋쩍게 웃는데 따라 웃어주고는 나가버린다

오늘은 13일의 금요일이다

미신이라해도 믿는 사람이 있는 불길한 숫자와 요일에 비가 온다 이미 장마가 지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쏟아지는 폭우 오늘 여자는 우산이 없었는지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는 바에 들어왔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을 툭툭 털고는 바에 앉았다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니 웃으며 고맙다고 하는데 오늘따라 그가 유독 힘들어보였다 무슨 일 있었냐 물어봤자 대답하지 않을 테니 나는 질문 대신 여자가 자주 마시던 진 온더락을 내왔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자가 대뜸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적잖게 놀랐지만 평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다 들통났을 것 같긴 하지만...

오늘이 언니의 기일이다, 하필이면 13일의 금요일에 비까지 온다, 집에서 불이 났다,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는데 살리지 못했다... 친언니? 어느 집? 불? 누가? 자신이? 궁금한 건 많지만 묻지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가 언니에 대한 말을 늘어놓다 말고 갑자기 뚝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
언니는 돈이 없었어요
...
저는 돈이 있었는데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금 맥락없이 말을 이어갔다 돈은 무슨 상관이며 그게 어째서 자신이 죽였다는 발언까지 이어지는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 하나만 알 것 같았다

그는 슬퍼보였다

갑자기 이런 얘기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끝으로 여자는 남자가 데리러 오지 않았는데도 아직 마르지 않은 겉옷을 챙겨 입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네요. 내가 덧붙이자 여자는 몰래 나온 거라 빨리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였지만... ...

자유롭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그의 눈이 슬퍼보였을 뿐이다

지금 누군가 현관을 두드린다 어째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늘이 13일의 금요일이라 그런 것일까?

저날 집에 들어간 키세키 산즈랑 대판 싸웠어 말없이 나간 거 때문에 말다툼 좀 하다가 분위기 타는데 키땅은 지금 할 기분 아니라 하고 산즈는 내가 언제부터 니 기분 신경써줬다고... 함서 옷 벗기려다가 발로 얼굴 걷어차여서 어이 털려서 할 말 잃는...

십 년이나 같이 지냈으면 신경 좀 쓸 때 됐잖아 개자식아
...
내가 널 얼마나...

...됐어. 키세키는 그대로 비에 젖은 몸 씻으러 가버리고 산즈는 자기가 뭔가 실수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어서 카쿠쵸한테 전화 걸어서 물어봐 오늘 무슨 날이냐고

그건 왜
모르면 됐다
... 아, 어제 기일이었네
누구?
이누이 아카네

자정 지나서 어제 체감으로는 오늘이나 다름없는 언니의 기일 아 씨발... ... ... 좆됐네 한숨 푹 쉬는 산즈에 카쿠쵸가 잘 달래줘. 하겠지 산즈도 한참 대답 안 하다가 너 오늘 안 들어오냐? 할 일 있어서. 그래. 하고는 전화 끊어버려

씻고 나온 키세키 머리도 안 말리고 냅다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워서 멍때리는데 산즈가 들어와서 안 자냐? 물어보면 대꾸도 안 해 산즈 헛웃고는 뒤에서 키땅 목 감싸안고 기분 안 좋으면 잠이나 자라 하는..

예전에
...
이러고 잠들고 일어나면 항상 넌 내 곁에 없었어
그랬나

오늘은 있어줘
알겠어
...
약속할게
미안해서 그래?
딱히
미안하다는 말 할 줄 모르지?
너도 마찬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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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산즈가 마약에 손 댄 이유도 수급책이었던 키땅이 먼저 취해서 같이 하자니까 기분 좋아져 하루치요 넌 항상 슬퍼보여서 그래... 라고 꼬드긴 거였어 와중에 키땅은 나중에 지 혼자 홀라당~ 빠져나가고 산즈 혼자 독에 빠져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도...

관만부터 범천까지 살 부비고 살아온 간부들은 당연지사 나눠달라 했으면 했지 굳이 지 좋자고 한다는데 말릴 필요성을 못 느꼈을 거고 카쿠쵸는 키세키만 정신 차리면 되는 거였어서 산즈한테는 관심이 없는... 키땅이라고 딱히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가끔 착잡해

무겁게 늘어진 몸을 품에다 꼭 끌어안고 달래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아무말도 안 하고 그냥 안아만 줘 아이처럼 웅얼거리는 입술에 가끔 입맞춰주고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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